
2022년 호주에서 장을 보러 갔다가 멈칫한 적이 있습니다. 늘 사던 달걀 한 판 가격이 몇 달 사이에 두 배 가까이 올라있었습니다. 양상추 한 포기가 10달러가 넘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호주 물가가 원래 비싸니까"라고 넘겼는데, 주변 상황을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카페가 문을 닫고, 자영업자들이 힘들다는 말을 했고, 지인 한 명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물가는 오르는데 경기는 나빠지는 이상한 상황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뉴스에서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교과서 속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는데, 그 시기를 직접 살아내면서 이게 단순한 경제 용어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 이름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스태그네이션(Stagnation, 경기 침체)과 인플레이션(Inflation, 물가 상승)을 합친 단어입니다. 경기는 나쁜데 물가는 오르는 상황입니다.
보통 경제는 이렇게 작동합니다. 경기가 좋으면 사람들이 많이 쓰고 물가가 오릅니다. 경기가 나쁘면 소비가 줄어들고 물가가 안정됩니다. 그래서 중앙은행이 물가가 너무 오르면 금리를 올려 소비를 줄이고, 경기가 너무 나쁘면 금리를 내려 소비를 늘리는 방식으로 균형을 잡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이 공식이 완전히 무너집니다. 경기가 나쁜데 물가까지 오릅니다. 금리를 올리면 물가는 잡히지만 이미 나쁜 경기가 더 악화됩니다. 금리를 내리면 경기는 살아날 수 있지만 물가가 더 오릅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도 누군가는 피해를 봅니다. 정책 입안자 입장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2022년 호주에서 직접 목격한 것들
2022년 호주의 상황이 스태그플레이션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징조를 강하게 보여준 시기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공급망 마비로 물가가 급등하는 동시에,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경기가 냉각되는 과정이 동시에 펼쳐졌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 중의 하나는 슈퍼마켓 식료품 가격이 매달 올랐던 것입니다. 특히 달걀, 채소, 육류 가격이 눈에 띄게 올랐습니다. 동네 카페 주인이 "손님은 줄었는데 재료비는 올라서 못 하겠다"며 영업 시간을 줄였습니다. 주변에서 모기지 이자가 두 배 가까이 올랐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렸습니다. 금리가 오르면서 집값도 내려가기 시작했고, 건설 경기가 위축됐습니다.
물가가 오르는데 동시에 경기가 나빠지는 경험을 몸으로 하고 나서, 스태그플레이션이 왜 가장 고통스러운 경제 상황인지를 이해했습니다. 인플레이션만 있으면 임금이 오르면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경기 침체만 있으면 물가라도 안정됩니다. 하지만 둘이 동시에 오면 실질 구매력이 두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받습니다.
역사에서 배우는 스태그플레이션의 교훈
스태그플레이션이 실제로 심각하게 발생한 건 1970년대입니다. 1973년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공급을 급격히 줄이면서 유가가 네 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에너지 비용이 오르자 생산 원가가 높아졌고, 모든 물건 가격이 올랐습니다. 동시에 생산 비용 부담으로 기업들이 생산을 줄이고 실업이 늘었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와 연준은 이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물가를 잡으려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더 나빠질까봐 망설였고, 결국 물가도 잡지 못하고 경기도 살리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10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1980년대 초 폴 볼커 연준 의장이 기준금리를 20%까지 올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 결과 물가는 잡혔지만 극심한 경기 침체가 왔고 실업률이 치솟았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대가가 그만큼 컸습니다.
이 역사에서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건, 당시 정책 당국이 무능했던 게 아니라 선택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물가를 잡으면 실업자가 늘고, 실업을 줄이면 물가가 더 오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누군가가 피해를 봅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항상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에게 더 크게 돌아갑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서민에게 더 가혹한 이유
여기서 한 가지 비판을 하고 싶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고통은 모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습니다.
자산이 있는 사람은 인플레이션 시기에 자산 가치가 오르면서 어느 정도 방어가 됩니다. 집이 있으면 집값이 오르고, 주식이 있으면 명목 수익이 납니다. 하지만 월급만 받는 사람, 자산이 없는 사람은 물가가 오르는 만큼 실질 소득이 줄어드는 걸 고스란히 감당합니다.
2022년 호주에서 물가가 급등할 때, 집을 소유한 사람과 렌트로 사는 사람의 체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렌트비도 같이 올랐기 때문에 자산 없이 월급만 받는 사람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경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메커니즘 중 하나입니다.
정부가 이 상황에서 물가를 잡는 정책을 우선시할 때,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건 대출이 많은 중산층과 자산이 없는 서민입니다. 금리가 오르면 모기지 이자가 올라가고, 자영업자 대출 이자가 올라가고, 일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정책의 고통이 가장 취약한 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이 저는 가장 불공평하게 느껴집니다.
스태그플레이션 시기에 개인이 할 수 있는 것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스태그플레이션을 개인이 완전히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거시경제 흐름은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를 줄이는 방법은 있습니다.
비상금의 중요성이 평소보다 훨씬 커집니다. 경기가 나빠지면 일자리를 잃거나 수입이 줄어드는 위험이 생깁니다. 동시에 물가가 올라 생활비 부담이 커집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오는 상황에서 비상금 없이는 버티기 매우 어렵습니다. 제가 2022년 호주에서 불안했던 가장 큰 이유도 비상금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인플레이션에 강한 자산을 포트폴리오에 일부 갖는 게 도움이 됩니다. 금, 원자재, 물가연동채권(TIPS) 같은 자산은 인플레이션 환경에서 상대적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스태그플레이션 환경은 어떤 자산도 완벽하게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변동금리 대출이 있다면 고정금리로 전환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스태그플레이션 대응으로 금리 인상이 이어지면 변동금리 대출자는 이자 부담이 급격히 커집니다.
마무리
스태그플레이션은 경제학자들도 해결하기 어려워하는 복합적인 위기입니다. 2022년에 그 징조를 직접 경험하면서, 이게 단순한 경제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상황이 오기 전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비상금을 충분히 갖추고, 변동금리 대출을 줄이고, 인플레이션에 어느 정도 방어력을 갖춘 자산으로 분산하는 것. 화려한 전략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한 준비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버티는 힘이 됩니다.
경기도 나쁘고 물가도 오르는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큽니다.